을사늑약이 체결된 1905년은 조선이 사실상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한 역사적인 변곡점이었습니다. 이때를 전후해 민중은 물론 유생과 의병장들이 자발적으로 들고 일어나 무장 저항을 전개했고, 이걸 우리는 을사의병이라고 부릅니다. 단순한 분노의 봉기가 아니라, 유교적 충절과 민족적 위기의식이 만나 조직적으로 움직인 초기 의병운동의 본격적인 시작점이기도 했습니다
을사의병은 전국 각지에서 들불처럼 일어났고, 특히 충청도·강원도·전라도·경상도 등 지역에서 강하게 전개됐습니다. 이 시기의 의병은 명확한 정치적 명분과 도덕적 근거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단순한 민란이 아니라 민중과 지식인의 결합 형태로 발전해요. 병력은 수십 명에서 수백 명 단위로 구성됐고, 각 지역의 유생이나 선비 출신 인물이 중심이 돼서 ‘창의문’을 띄우고 부대를 조직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일본의 침탈에 반발해 외교 고문을 자처한 일본인을 처단하거나, 친일 관료의 암살을 시도하는 일도 있었고, 관공서나 통신선 공격 등도 이 시기에 등장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 중 한 명은 신돌석입니다. 신돌석은 양반이 아닌 평민 출신으로서 의병장이 되었는데, 당시로선 매우 드문 사례였죠. 그는 경상북도·강원도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실제 전투를 많이 치렀고, 조직력과 전략 면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의병사에서는 ‘최초의 평민 의병장’으로 불리며 상징적 인물로 남아 있어요
유생 중심으로는 이인영, 민종식, 최익현 같은 인물이 눈에 띕니다. 특히 최익현은 을사늑약 체결 후 상소를 올리고 스스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 체포되어 결국 쓰시마 섬에서 순절합니다. 그는 무장투쟁보다는 의리와 충절, 명분을 중시한 전통 유생형 의병의 대표적인 존재예요
이인영은 서울진공작전이라는 대규모 작전을 계획했던 인물인데, 그는 전국 의병을 하나로 묶으려는 시도를 했지만 조직과 물자 부족, 내부 분열 등의 이유로 작전은 실패로 끝나고 맙니다. 하지만 그의 시도 자체가 이후 13도 창의군 같은 전국적 의병 결성을 촉진하는 계기가 됩니다
또한 민종식은 충청도 지역에서 크게 활동했고, 일본군과 정면 전투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관료 출신으로서 민족적 의무를 실천한 인물 중 하나로 남아 있고요
이 시기의 의병운동은 조직력이나 군사력 면에서는 제한이 있었지만, 일제의 강압통치를 민간 차원에서 저지하려 한 최초의 본격 저항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습니다. 이후 1907년 군대 해산 이후 의병운동이 다시 대규모로 확산되는 계기도 바로 을사늑약과 을사의병의 흐름 위에서 시작되죠
결국 을사의병은 명분과 도덕을 무기로 시작한 자발적 저항의 역사이고, 신돌석이나 최익현, 이인영, 민종식 같은 인물은 그 중심에 있었습니다